한국바둑의 역사를 논하려면 아쉽게도 일제강점기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물론 그이전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나라도 바둑을 두어 왔지만 현대의 한국바둑은 아무래도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게 사실이고 근현대식 룰이 적용된 기원이 최초로 설립된 시기가 1937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원은 1937년에 설립된 경성기원이다. 

당시 바둑을 두는 계층은 주로 학자,예술인,기자,문인등 주로 지식인들로 상류계층이 대다수였고 이들은 주로 다방이나 기원에 모여 교류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원은 1937년 민영휘 별장을 임대하여 운영한 경성기원이 시초이다.
당대의 바둑 고수인 노사초를 비롯 채극문 유진하 정규춘등이 애기가로 소문난 민영휘를 찾아가 임대하였고 월임대료는 25원이었다고 한다.
기원이 설립되고 시작된 근대바둑은 이후 20년 가까이 지식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 내었지만 기력을 향상시키거나 바둑의 대중화에는 한계를 보인 시기였다.
먹고 살기 힘든 시기였기에...

한국바둑은 광복과 6.25전쟁을 거친 후 드디어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중심엔 한국 현대바둑의 선구자,대부로 호칭되는 조남철선생의 공이 크다.
1923년생인 조남철선생은 전쟁이 터진후 입대하게 되어 고지쟁탈전에서 부상을 입고 요양병원에 있게 되는데 여기서 방한칸짜리 기원을 열고 기료를 받아 운영하였고 기료는 패자가 승자몫까지 지불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보통 요즘 기원에서 기료내기 바둑을 두는 것의 효시라 할수 있고 당시는 전쟁이 터진 상황이라 승자독식의 체제가 대세였다는 생각이 든다.



■1950년대는 한국바둑의 태동기
전쟁이 끝난 후 부산지역에 모여있던 애기가들도 고향으로 흩어졌고 서울에도 동네마다
기원이 생길 정도로 성행하였지만 바둑인구는 여전히 많지 않은 상태였고 부유층의 놀이나 한량들의 시간을 때울 장소로 애용되었고 애기가 중에 선각자 역할을 한 조국수 같은 분들은 기원을 세워 바둑 대중화에 힘을 쓴 시기였다.
조남철선생은 현재의 한국기원 전신인 한성기원을 1945년에 설립하고 바둑의 보급과 바둑대회 창설등 한국바둑의 체계를 만들려고 노력하였고 그결과 1956년 한국 최초의 프로기전인 국수전이 탄생하게 된다.

사진은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제1기 국수전 예선대국 장면인데 제1기 국수전은 조남철4단이 차지하여 조남철선생의 생전 호칭을 조국수님이라 자주 불리우곤 했다.
여기서 잠깐, 한국바둑의 선구자이며 한국 최초의 프로기전 우승자인 조남철선생의 유년시절로 돌아가 보면 1930년대 어린이 조남철은 바둑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고 바둑계 유명인사의 주선으로 마침 우리나라를 방문한 일본 바둑계의 거장 기타니와 지도기를 두게 되었고 그사건으로 어린 조남철은 기타니문하로 입문하게 되어 일본바둑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사진은 조남철의 11세때 모습(좌)이며 상대는 일본 양대바둑문파의 하나인 기타니 미노루이다.

■1960년대는 한국바둑의 도약기
1950년대 중후반기에 프로기전이 창설되고 우승은 일본유학파 1호인 조남철선생의 몫이당연한 결과였고 1960년대가 되어 대회수가 늘어도 조남철선생의 독주체제는 영원할 것 처럼 보였다. 1인독주가 계속되었지만 바둑대회의 증가로 바둑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960년대 후반에는 조남철선생의 독주에 브레이크를 거는 기사가 탄생하였으니 바로 김인선생(현한국기원 상임이사)이다.
김인선생은 1965년 국수전우승을 필두로 67년 최고위전우승,69년 2기명인전우승을 차지하며 포스트 조남철을 외쳤지만 곧바로 나타난 신예기사에게 눌려 장기집권체제는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사진은 1968년에 열렸던 13기 국수전 김인 vs 조남철 대국의 야외공개해설 장면으로 당시의 바둑인기와 저변화 확대에 성공했다는 자료이기도 하다.

 

■1970년대는 한국바둑의 발전기 - 조서시대의 개막
1970년대 초반 한국바둑의 정상의 자리로 혜성처럼 등장한 이가 바로 서봉수였다.
1970년 만18세의 헝그리기사 서봉수는 일반인 입단대회를 통해 프로기사가 되었고 이전에는 동네기원에서 형님,아저씨들과 내기바둑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생계형 바둑꾼이었던 그가 프로입문후 기력이 일취월장하여 2년만에 명인전을 쟁취하게 된다.
그것도 당대의 최고수 조남철선생을 상대로 말이다.
1960년대 중후반 김인의 등장으로 조남철 선생의 1인독주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여전히 한국바둑 부동의 최고수였고 그런 그가 이제 막 20세가 된 청년 서봉수에 덜미를 잡히며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여기에 도일파 조훈현이 군복무 문제로 귀국과 동시에 합류하게 되어 조-서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사실 이때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조서시대라 불리지만 조훈현의 독주체제에 간헐적으로 서봉수가 응징하는 형태였다.
조서시대라 불리게 된 배경은 서봉수 이외에는 조훈현에 브레이크를 걸만한 기재가 나타나지 않았고 두명의 젊은기사의 경쟁심리로 이들의 기력은 세계(일본)수준과 빠르게 접근하는 시기였지만 나머지 기사들은 이들의 기에 눌려 침체된 상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70년대 초반은 김인-조남철시대에서 서봉수 조훈현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시기였다.

사진은 1972년 명인전 도전기 4국 조남철선생(좌)과 서봉수 도전자(우)의 대국장면으로
4국에서 승리를 거둔 서봉수가 종합전적 3승1패로 만19세의 나이에 명인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1980~1990년대는 한국바둑의 중흥기
조-서 시대가 10년 넘게 이어지고 라이벌의식으로 조훈현,서봉수의 기력은 점점 향상되지만 조-서의 기력향상 속도에 비해 다른 기사들의 기력증진은 상대적으로 느려 전체적인 프로기사들의 기력향상을 위해 한국기원에서 도전5강이란 타이틀로 조-서의 아성에 도전하는 기사를 만들었는데 이들이 바로 백성호,김수장,강훈,서능욱,장수영 이었다.
하지만 도전5강은 강훈만이 박카스배에서 1회 우승을 하는데 그치고 조-서 시대를 허물지 못하게 되었고 80년대 중후반 유창혁과 이창호의 등장으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게 된다.
유창혁과 이창호가 슬며시 한국바둑의 정상권에 접근하려는 시기에 조훈련은 제1회 응창기배에서 일본과 중국 벽을 허물며 우승을 차지 최절정의 기량을 과시해 이제는 중국 일본 바둑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내는 계기가 되었다.

1989년 제1회 응씨배 결승에서 철의수문장이라 불리우는 중국의 섭위평9단을 상대로 3승2패를 거둬 우승을 차지한 조훈현9단은 당시 귀국후 카퍼레이드까지 하는등 국내의 바둑열기를 높이는데 크게 일조 하기도 했다.

조훈현의 날카로움,서봉수의 실전력,유창혁의 전투력,이창호의 두터움 각기 다른 기풍을 보이는 1990년대의 한국바둑 4인방은 세계바둑을 점령하는데 바둑올림픽이라 불리는 응씨배에서 1회부터 4회대회까지 조훈현,서봉수,유창혁,이창호가 연속 우승을 차지해 이를 입증하게 되었고 조훈현과 이창호는 80년대와 90년대 한국프로기전을 모두 휩쓰는 전관왕의 위엄을 여러차례 달성하기도 했다.

21세기 한국바둑은 바둑인구가 천만이 넘는 대중화에 성공하였고 과거 소수 몇명의 기사가 좌우하던 시기를 지나 전체 프로기사들의 기력이 향상된 모습을 보이며 이세돌,박정환,김지석,최철한,강동윤,박영훈등이 정상권 기사로 활동하는 중이다.

■한국바둑 프로기사의 통산 기록
끝으로 한국 프로기사들의 통산기록과 성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바둑 프로기사중 통산 다승1위는 1920승을 거둔 조훈현9단이며 2위는 1681승의 이창호9단 3위는 서봉수9단이 1565승을 거둬 차지하고 있으며 유창혁과 이세돌이 그뒤를 잇고 있는 상황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